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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독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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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수출지원 해외 서포터즈 / 김대한(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독립기념일은 지난 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의례적 장치다. 1991년 9월 1일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독립기념일은 주권 회복과 민족 정체성 재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민들에게 이 날은 소비에트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국가로 걸어온 34년의 여정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독립 이후의 정치·경제적 변혁, 사회적 도전과 성취,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적 위상은 모두 이 기념일을 통해 되새겨진다. 특히 비즈니스와 경제 영역에서도 독립은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연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결국 독립기념일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성취, 미래의 비전을 아우르는 역사적 회랑으로서 우즈베키스탄 사회 전반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타슈켄트의 독립광장 

(출처: Darakchi.uz) 

 

 

역사적 배경 

 

1. 우즈베크 공화국 설립과 소베이트 통치

20세기 대부분 동안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zbek SSR)으로 존재했다. 1924년 중앙아시아의 행정구역이 민족 경계를 기준으로 재편될 때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925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 명목상 자치 공화국이었으나 실제 정치 권한은 모스크바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공산당(CPUz)이 공화국 정부를 장악했으며, 당 서기장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초창기에는 우즈베크인보다 러시아인을 비롯한 비중앙아 출신 간부들이 당과 관료 체제의 핵심을 차지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일부 우즈베크 지도자들도 소련 중앙정부에서 활동했으나, 대다수 국민은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특히 1937~1938년 스탈린 시기의 대숙청으로 우즈베키스탄 지식인과 민족 지도층 상당수가 희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소련 서부 지역의 산업과 인구가 대거 이주해 현지 사회 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소비에트 통치하에서 러시아어는 사실상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우즈베크어는 부차적 위치에 머물렀다. 1940년대 우즈베크어 표기 문자가 라틴문자에서 키릴문자로 변경된 것도 러시아어 및 소비에트 문화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종교 활동은 엄격히 제한되어 전통적으로 깊었던 이슬람 신앙은 공산당의 세속주의 정책 속에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현대적 공업화와 교육 제도의 도입으로 문맹률이 감소하고 도시화가 진전되는 등 근대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 이면에는 중앙정부의 착취적 경제 정책과 문화적 탄압이 병존했다.

 

소련은 우즈베키스탄을 중앙아시아의 농업 생산기지로 활용했다. 특히 면화를 ‘백금’이라 부르며 전략 작물로 육성했는데, 1960년대 이후 우즈베키스탄은 소련 전체 면화 생산량의 약 61%를 공급하는 주요 재배지로 성장했다. 이를 위해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의 물을 대규모 관개농업에 전용했고, 대부분의 농지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체제로 편제되어 생산 할당량이 강제되었다. 이러한 단일작물 경제는 소련 공업지대에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했지만, 현지의 식량 자급 기반을 약화시키고 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랄해의 생태 파괴다. 면화 재배를 위해 강물이 과도하게 사용되면서, 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컸던 내륙호 아랄해는 수위가 수십 미터 낮아지고 면적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과거 어업과 관광으로 번성했던 주변 도시는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어선들만 남긴 채 황폐화되었다.

 

2. 민족 정체성과 저항

소비에트 통치 시기 공식적으로는 범소비에트 국민 정체성이 강조되었고, 현지 민족주의는 억압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영역에서는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20년대 소비에트 초기, 중앙아시아 전역에서는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바스마치 운동’이라 불린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며,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도 바스마치 세력이 소련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진압당했다. 이후 수십 년간 눈에 띄는 저항 운동은 거의 없었지만,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과 예술계를 중심으로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1988년 작가와 지식인들은 ‘비르릭’(Birlik, 우즈베크어로 ‘단결’) 운동을 결성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우즈베크어를 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1989년 10월 우즈베크 SSR 최고회의는 러시아어와 함께 우즈베크어를 국가 공식 언어로 승인했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 내 중앙아시아 공화국들 가운데 자국어 지위를 회복한 첫 사례로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비르릭은 소련 체제의 경직성과 환경 문제(특히 아랄해 사태)를 비판하며 농업 구조 다변화와 공화국 자치권 확대를 주장했다. 일부 활동가들은 나아가 사실상의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움직임은 공화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어, 비르릭과 이어 결성된 야당 ‘에르크’의 활동은 점차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1990년 전후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민족 자결과 주권 요구가 표출되면서 독립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3. 소련 해체와 우즈베키스탄의 선택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 정책으로 언론 자유가 확대되고 공화국 자치 논의가 가능해지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공산당 내부 개혁파와 외부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권한 강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수뇌부는 완전한 독립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재정 보조와 원유·공업제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독립 시 이러한 지원을 잃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990년 6월 20일, 우즈베크 SSR 최고회의는 주권선언을 통해 공화국 법의 우위를 인정하며 일정한 자치권을 선포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방 내 주권 선언에 머물렀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직접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새로 부상한 공산당 서기장 이슬람 카리모프(Islam Karimov)는 공화국의 이익을 강조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연방 잔류 입장을 견지했다. 실제로 1991년 3월 소비에트 연방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 유권자의 다수는 연방 유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쿠데타가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에 카리모프를 비롯한 우즈베키스탄 지도부는 연방 안정을 이유로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으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 공화국이 옐친의 지도 아래 급속히 독립 노선을 택하자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1991년 8월 31일, 우즈베키스탄 최고회의는 국가 독립 선언을 전격 채택했고, 이튿날인 9월 1일을 독립기념일로 선포했다. 이는 소련 공식 해체보다 석 달 앞선 조치로, 중앙아시아 공화국 가운데 가장 빠른 독립 선언이었다. 이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고, 같은 해 12월까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독립을 승인했다.

 

 

독립광장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행사 

(출처: Sputnik.uz)

 

 

독립 이후의 정치·경제적 변혁 

 

1991년 말, 우즈베키스탄은 독립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일련의 정치 일정을 추진했다. 12월 29일 실시된 독립 찬반 국민투표에서 98% 이상이 독립을 지지하며, 이미 선포된 독립을 국민적 의사로 확고히 했다. 같은 날 치러진 첫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는 공산당 출신 이슬람 카리모프가 약 8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독립국으로서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국기·국장·국가 등 새로운 상징이 제정되었다. 또한 외교 관계 수립과 UN 가입 등 독립국으로서의 절차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시기 소비에트 연방군에 속해 있던 우즈베크 출신 병력과 자산은 신생 우즈베키스탄 군대로 편입되었으며, 루블화 사용을 중단하고 독자 통화인 숨(Soʻm) 도입을 준비하는 등 체제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소련 말기 이미 체제 붕괴가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우즈베키스탄 내부의 독립 반대 세력이 크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초대 대통령 카리모프 치하에서는 국가 정체성 확립이 강력히 추진되었다. 그는 투르크계 역사 영웅 아무르 티무르를 민족 영웅으로 재조명하고, 우즈베크어의 위상을 강화하는 등 민족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대외적으로는 독립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하고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점차 자주 노선을 강조하며 균형 외교를 지향했다. 1990년대 말에는 미국 및 서방과 안보 협력을 모색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군 기지 주둔을 허용했으나, 이후 서방과 관계가 악화되자 미군을 철수시키고 러시아·중국과 다시 밀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특정 외세에 종속되지 않는 원칙을 유지하며 다각적 외교와 비동맹 노선을 견지했다. 러시아 주도의 군사동맹(CSTO)과 유라시아경제연합에도 일시적으로 가입했으나 이후 탈퇴하거나 소극적 참여로 전환했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도 협력하면서도 채무 부담을 경계하는 등 실리적 접근을 택했다.

 

2016년 카리모프 대통령 사망 이후 총리였던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는 “신(新) 우즈베키스탄”을 기치로 내걸고 정부 운영의 투명성 제고, 행정 개혁,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2023년에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가결되었으며, 개정 헌법에는 “우즈베키스탄을 인간 존엄과 법치가 보장되는 국가로 현대화한다”는 목표가 담겼다. 동시에 입법·사법 개혁과 인권 보장을 약속하며 정치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점진적 개혁은 우즈베키스탄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이 나라를 투자 대상으로 주목하는 국제 비즈니스계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1. 산업 다변화 노력과 경제 성과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우즈베키스탄은 면화 중심의 농업 구조를 완화하고 자국 산업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힘써왔다. 정부는 식량 안보를 명분으로 일부 면화 경작지를 밀이나 기타 곡물 재배지로 전환해 곡물 자급률을 높였으며, 소련 시절 거의 존재하지 않던 자동차 조립·가전제품 생산 등 경공업을 해외 자본과의 합작을 통해 육성했다. 1996년에는 한국 대우자동차와 합작으로 최초의 국산 자동차 공장(우즈대우, 현 GM-Uzbekistan)을 건설해 본격적인 제조업 시대를 열었다. 

 

또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금·우라늄·천연가스 개발에 투자가 집중되었다. 천연가스는 소비에트 시절 주로 국내 소비에 쓰였으나, 독립 이후 해외 수출을 위한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서 21세기 들어 중국 등지로의 수출을 통해 외화 수입을 올렸다. 다만 최근에는 가스전 생산량이 정점을 지나 노후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수출 감소와 국내 에너지 부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소련 시기에 소홀했던 유전 개발에도 착수해, 1994년 페르가나 분지에서 새로운 유전을 발견하고 민간 투자를 유치해 석유 생산 확대를 꾀하고 있다.

 

2016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 자유화 조치도 본격화되었다. 오랫동안 이중환율제와 엄격한 환전 제한으로 악명 높던 우즈베키스탄은 2017년 환율 단일화와 숨(Soʻm) 태환 허용을 단행하며 외국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큰 장벽이었던 통화 규제를 철폐했다. 이어 세제 개혁, 무역 관세 인하, 창업 절차 간소화 등 일련의 비즈니스 환경 개선 조치를 통해 국내외 투자 활성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신규 창업 기업 수가 급증해 최근 1년 사이에만 4만 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새로 설립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우즈베키스탄은 2023년 한 해에만 약 100억 달러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투자를 유치했으며, 향후 10년 내 GDP를 두 배로 늘리고 1인당 GDP 4천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경제성장률은 5~7%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인구 증가에 따른 내수 확대와 맞물려 산업 전반에 활력이 감지된다. 

 

독립 후 30여 년간 우즈베키스탄 경제는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성공했으며, 이제는 중진국 도약을 향한 변혁의 길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현대 경제와 국제적 위상

3,500만 명을 넘어선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아, 역내 최대 시장이자 인력 공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풍부한 청년 인구는 경제 성장의 잠재력인 동시에 일자리 창출이라는 과제를 안겨준다.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은 우즈베키스탄이 추진한 구조개혁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국영기업 민영화의 신중한 추진과 금융 부문의 건전성 확보가 지속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역 측면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이웃 국가들과의 철도·도로 연결을 강화하며 중앙아시아 지역 통합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남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물류 루트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향후 중앙아시아 물류의 요충지로서 우즈베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풍부한 천연자원, 거대한 내수시장, 비교적 안정된 치안은 주요 투자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개헌과 제도 개혁을 통해 개방과 발전 의지를 보여주면서 국제 사회의 신뢰 역시 높아지고 있다.

 

 

맺음말

 

우즈베키스탄의 독립기념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역사적 회랑과 같다. 소비에트 연방 지배 시절의 아픔과 유산을 기억하는 동시에, 1991년 독립 이후 걸어온 정치·경제적 변혁의 길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독립 34주년을 맞은 우즈베키스탄은 많은 도전을 극복하며 성장해왔다.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점진적 개방과 개혁을 추진했고, 경제적으로는 폐쇄적 계획경제에서 역동적 시장경제로 체질을 바꾸며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독립기념일 축제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을 때, 국민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행복과 번영에 대한 염원을 새길 것이다. 그 불꽃은 1991년 9월의 첫 독립의 함성과, 앞으로 세대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신 우즈베키스탄”의 꿈을 함께 비추는 빛으로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 위 원고는 현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원고로, (사)경북PRIDE기업 CEO협회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